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면 내각 (문단 편집) === 무능하고 혼란한 정권이었는가? === 장면 내각을 무너뜨린 [[박정희 정부]]는 장면 내각이 전략적으로 무기력하고 통제력이 없는 정권이었다고 주장하였고 많은 [[보수]] 우파 세력들도 이러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우파]]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및 [[민주화]] 세력 혹은 [[좌파]]들에게도 장면 내각은 한동안 부정적으로 비쳐졌다. 기껏 4.19 혁명을 이뤄놓고 제대로 나라를 이끌지 못해 [[군부]]에 나라를 내줬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면 내각은 정치적 불안에 시달려왔다. 1960년 6월에 국회는 [[의원내각제]]로 정부형태를 바꾸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내각제]]는 이승만정부에 대항해 온 [[민주당(1955년)]]이 처음부터 고수해 온 당론이었다. 민주당은 이승만의 [[권위주의]] 정치를 비판해왔는데 4.19는 민주당에게 이들이 주장해 온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새로운 국회에서 지배 정당이 된 민주당 내부에는 구파와 신파의 대립이 있었다. 그들은 [[무소속]] 당선인을 자파에 영입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그해 8월 민주당 구파에 속하던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도연(1894)|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했으나 국회에서 1표 차이로 인준을 받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신파에 속하던 [[장면]]을 국무총리에 임명하였고 국회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인준하였다. 장면총리는 [[국무위원]]들을 신파 일색으로 구성하였는데, 이는 구파의 큰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후 두 당파는 서로를 근본적으로 불신하였고 [[신민당(1960년)|신민당]]을 별도로 창당하였다. 장면 내각은 10개월 동안 무려 세 차례나 개각을 거듭하였다. 국무위원들은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기 일쑤였다. 또한 윤보선은 [[상징적 국가원수|상징적인 국가원수]]에만 머물려 하지 않았다. 헌법은 대통령이 [[정당]]에 속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는 민주당 내에 남아있는 구파나 신민당의 이해를 대변하였고 헌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발의된 이 애매한 규정은 대통령과 총리가 사사건건 대립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각료]] 자리를 둘러싼 장면 내각의 국정운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정치 불안은 5.16이 성공하는 주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며 민주화 투쟁을 하던 이들도 내각제로의 전환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즉 장면 내각은 자신이 만든 헌법을 정파간의 갈등 때문에 스스로 실천하지 못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헌정을 훼손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권위주의 정권이 막을 내리고 민주화 시대가 개막하여 '장면 정권은 1961년 초에 들어가면서 차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는 반론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역사관에도 많이 반영되었다. 4.19 혁명 1주년 큰 혼란이 올 것을 예상하며 계획했던 5.16 주동세력의 예상과는 다르게 대한민국은 평온하였고, 이 때문에 박정희는 [[쿠데타]]를 다음 달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사회 혼란을 '민주주의를 위한 당연한 진통'으로 파악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장면 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절대적으로 받는 정부가 아니었던 것은 사실이고, 아직 국민들 사이에서 민주주의적 의식이 확실히 자리잡지 않아 혼란상에 질려버린 국민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국민]]과 [[미국 연방정부]]는 모두 5.16 직후에는 중립적인 의견을 보냈고, 일부 [[지식인]]들은 5.16 군사 정변을 4.19 혁명의 연장 선상으로 보기도 했으며, 5.16초기에는 반체제 민주화 인사로 유명한 '''[[장준하]]'''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